
회의실에서 누군가 "큰 방향은 이미 정해졌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의견은 사실상 끝납니다. 저는 그 말을 해외 지사와의 프로젝트에서 여러 번 들었습니다. 처음엔 글로벌 협업이라는 말이 설레게 들렸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그건 또 다른 종류의 전장이었습니다. 영화 마이웨이를 보면서 그 감각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전쟁 구조: 위에서 내린 명령, 아래에서 치르는 대가
영화 마이웨이에서 가장 불편했던 장면은 화려한 전투 씬이 아니었습니다. 지휘관이 무리한 공격 명령을 내리고, 병사들이 그 결정의 무게를 몸으로 받아내는 장면이었습니다. 명령을 내린 사람은 살아남고, 명령을 받은 사람은 쓰러집니다. 이것을 군사학에서는 커맨드 레스폰서빌리티(Command Responsibility)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커맨드 레스폰서빌리티란 지휘관이 부하의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 법적·도덕적 책임을 진다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 전쟁터에서 이 원칙은 철저히 뒤집혀 있습니다. 결정은 위에서, 책임은 아래에서.
이 구조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제가 직접 겪어봤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해외 지사와의 프로젝트에서 출시 일정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여러 차례 올렸지만, 본사는 시장 선점이라는 명분으로 밀어붙였습니다. 현지 규정 검토, 번역 검수, 고객 대응 준비 모두 촉박한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일정은 바뀌지 않았고, 저희 팀은 주말과 새벽을 반납하며 버텼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터지자 "실행을 담당한 팀의 준비 부족"이라는 평가가 돌아왔습니다.
이런 책임 구조를 조직행동론에서는 책임 귀인 편향(Attribution Bias)이라고 설명합니다. 책임 귀인 편향이란 성공은 의사결정자의 공으로, 실패는 실행자의 탓으로 돌리는 심리적 경향을 말합니다. 실제 조직 내 갈등과 번아웃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히며,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의 연구에서도 직무 자율성 부재와 책임 불균형이 직원 소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나온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직업능력연구원:https://www.krivet.re.kr). 전쟁터든 회의실이든, 결정권과 책임이 분리될 때 사람은 소모됩니다.
전쟁이 개인에게 미치는 심리적 충격을 연구한 학자들은 이를 도덕적 손상(Moral Injur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도덕적 손상이란 자신의 가치관과 충돌하는 행위를 강요받거나 목격했을 때 발생하는 심리적 상처로, 단순한 스트레스와 다르게 자기 정체성과 신뢰 기반 자체를 무너뜨립니다. 영화 속 준식이 감당해야 했던 건 총알만이 아니었고, 제가 그 새벽 화상회의에서 느꼈던 것도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습니다.
전쟁 구조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결정권을 가진 사람과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 분리되어 있다, 명분(국가, 승리, 시장 점유)은 거대하지만 피해는 개인 단위로 쪼개진다, 실패 시 책임은 현장으로 흘러내리고, 성공 시 공은 위로 올라간다
조직 위계와 인간 연대: 소속이 적을 만들 때
마이웨이에서 준식과 타츠오는 처음에 서로를 경쟁자이자 적으로 인식합니다. 조선인과 일본인이라는 출신, 피지배자와 지배자라는 위치가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만들어 놓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구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극한의 상황에서, 소련군 포로수용소와 독일군과의 전투를 거치면서 두 사람은 소속보다 인간을 먼저 보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이 저에게 가장 크게 와닿았던 이유는, 저 역시 프로젝트 내내 해외 담당자를 일종의 '반대편'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무리한 요구를 전달할 때마다 본사의 대리인처럼 보였고, 제 편이 아니라는 인상이 쌓였습니다. 그런데 프로젝트가 끝나고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알게 된 건, 그 사람도 똑같은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탓할 상대가 아니라, 같은 구조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버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직 내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원인을 분석한 연구들은 이를 인그룹-아웃그룹 편향(In-group/Out-group Bias)으로 설명합니다. 인그룹-아웃그룹 편향이란 자신이 속한 집단(본사, 정규직, 국내팀)의 구성원은 신뢰하고, 반대 집단은 경계하거나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심리 기제를 말합니다. 이 편향은 실제로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을 불필요한 경쟁 관계로 몰아넣는 주요 요인입니다. 사회심리학 분야의 고전 연구인 로버스 케이브 실험(Robbers Cave Experiment)에서도 인위적으로 집단을 나누는 것만으로 적대감이 형성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https://www.apa.org).
저는 이제 같은 구조 안에서 다른 소속을 가진 사람을 볼 때 먼저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어떤 압박을 받고 있을까.' 마이웨이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도 결국 이것 같습니다. 국적, 직급, 소속이 다르더라도 같은 구조 안에서 버티는 사람끼리는 적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인식을 먼저 하는 쪽이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것.
큰 목표가 정당하다는 이야기와, 그 목표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당연하다는 이야기는 전혀 다릅니다. 영화 속 전쟁이 그랬듯, 조직 내 프로젝트도 목표 자체가 문제인 경우보다는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이 문제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저는 지금도 큰 방향이 정해졌다는 말을 들으면 한 번 더 묻게 됩니다. "그 방향은 여기 있는 사람들을 지키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나요?" 그 질문에 답이 없다면, 그건 전략이 아니라 명령입니다.